황룡강변에 핀 꽃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4/04 [19:21]

황룡강변에 핀 꽃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4/04 [19:21]



정읍과 장성을 가로 막은 험준한 노령산맥은 내장산과 이어진 백양산 깊은 산골에서 장성시내를 가로질러 황룡강(黃龍江)이 흐른다. 1894년 전라도 고부 땅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민중봉기는 이곳 장성 깊은 산골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군과 관군이 일대 대접전을 벌였던 125년 전 녹두꽃이 활짝 피었던 황룡촌대첩(黃龍村大捷)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갑오년 음4월19일(양5.23) 관군의 총제영중군(總制營中軍) 황현주(黃顯周)가 관군400명을 현익호(顯益號)기선에 싣고서 인천항을 출발하여 전남 법성포를 향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시 민비를 업어 피신시킨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1842-1895)은 경군이 온다는 연통에 4월18일 전주를 출발하여 정읍에 도착, 숙영(宿營)을 하고 그 다음날 고창을 거쳐 4월21일 영광에서 또 하룻밤을 보낸다. 4월22일 이른 아침 함평현감 권풍식(權豊植)의 급사(急使)로 부터 동학군이 함평현감에게 보내온 원정서(原情書)를 전달하고 함평에 머물고 있던 동학군이 나주, 장성 방면으로 이동 중이라는 보고를 받는다. 초토사 홍계훈은 수적으로 우세한 동학군과의 개전에 앞서 동학군을 달래기 위해 양호초토사 종사관 이효응(李斅應),배은환(裵垠煥)을 보냈는데 동학군에 잡혀 종무소식이었다. 동학군을 경계하기 위해 대관(隊官) 이학승(李學承),원세록(元世綠),오건영(吳健泳)에게 병정 300명과 구르프(克虜伯)식 야포 1문, 회전식 기관포 1문을 주어 장성에 급파 동학군과 맞서게 하였다. 4월23일 인천에서 출발한 현익호가 법성포에 입항하여 400명 경군은 영광 초토사군과 합류하였다. 그 당시 동학군의 규모는 4,000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2,000명은 화승총(火繩銃)으로 무장했고, 기병 100명은 2열로 나뉘어 수색에 종사하였으며 군량미는 뒤에서 조달했는데 그 동작은 양식조련(洋式操練)과 같아 지방민을 감복(感服)시켰다. 라고 한 것을 보면 동학군의 질서정연한 조련에 의한 진군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말해 주고 있다.  관군 장위영대관 이학승은 4월22 영광을 떠나 4월23일 오전에 장성에 도착 했는데 동학군 4-5천명이 황룡촌에 집결하여 식사 중 인 것을 알고서 황룡강을 건너 월평리(月坪里)로 진출하여 기습적으로 야포 2문으로 폭격을 가하니 동학군 4-50명이 쓰러졌다. 이에 동학군은 수적으로 우세를 앞세워 역습을 하니 관군은 야포, 기관포 1문과 탄약을 버리고 황룡강을 건너 영광 방면으로 도망을 하였다. 취호리 일대의 구릉(丘陵)은 황룡강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인데도 대관 이학승은 퇴각군을 엄호(掩護)하였으나 동학군의 추격을 받아 병사 5명이 전사하였다. 동학군이 경군정예부대를 물리쳐 개가를 올린 장성황룡촌 전투에 대하여 동학 측 기록인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동학군은 관군을 유인하여 전라도 남단까지 끌어내어 사이 길로 전주성으로 향하기 위해 장성에서 관군과 대격전을 하여 승첩을 하였다. 동학군은 장태 수십대를 산 정상에서 내려 굴리며 관군을 사격하여 시살하였고 홍진(洪陳-홍계훈) 장관(將官) 이효응,배은환과 관병 100여명을 몰사시키고 대포3문과 구르프포 회전기관포1문과 양총100여개를 빼앗았다.>라고 적고 있다.      

벚꽃이 만개한 황룡강변은 오늘따라 너무나도 평화롭다. 125년 전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든 동학혁명운동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1894년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을 끌어들인 민비는 또 다른 적 일본군이 들어와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터졌고, 이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힘을 받아 만주 진출을 하자 러시아와 충돌한 러일전쟁(1904.2.8~1905.9.5)으로 번져, 러시아를 이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동양인이 서양 백인을 이겼다는 일본은 우월감에 도취 된다. 이에 앞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박영효는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을 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또다시 귀국해 1894년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는 장장 13만 8천 자에 달하는 피맺힌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일본의 배신과 수구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개화파들과 함께 또다시 일본에 장장 20여 년간의 망명생활을 하였다. 일본은 청국을 끌어들인 걸림돌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으로 신변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1896년 병신년에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을 하게 되나 사실상 국권은 일본인 손에 넘어가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동학군은 황룡천대첩으로 사기충천하여 전주성을 향한다는 첩보를 받은 관군은 긴장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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