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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역사속에 지켜낸 조갑녀 명무의 살풀이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04/21 [20:24]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조명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춤의 역사에도 회복되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이 시기 한국궁중무용의 실질적 근간이었던 관기(官妓)의 집단인 장악원과 지방교방청이 폐지되면서 예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일제는 우리의 교방문화를 권번(券番)으로 바꿔 조선 최고의 예인을 창기로 전락시키는 아픈 역사를 안겨줬다.
결국 이를 거부한 예인들이 재야로 숨어들면서 찬란했던 한국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은 역사속으로 살아져갔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 기쁨과 슬픔, 한과 서러움, 멋과 흥을 동시에 담아 낸 명무 조갑녀의 삶과 선생의 대표 춤인 남원살풀이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조갑녀 선생의 남원살풀이는 민살풀이로 왜곡, 전락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조갑녀 명무의 대표 춤 살풀이는 전라도 시나위권의 무악으로 애원성 짙은 가락에 맨손으로 표현했던 춤사위다.
무대가 마당에서 극장식 무대로 옮겨지면서 손에 수건을 들고 좀 더 큰 동작과 화려한 표현으로 변질됐다.
6살에 남원권번에 입소해 혹독한 예절교육과 소리, 시조, 춤을 배웠던 어린 조갑녀의 춤은 1회부터 11회까지 춘향제를 빛낸 전라도의 대표 민속춤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재야로 묻혀 있던 시간 속에 그의 춤은 수건살풀이에 밀려 민살풀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둔갑됐다.

주변의 간곡한 부탁에 2007년 다시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조갑녀 살풀이는 민살풀이로 전락해 극장화 된 수건 살풀이가 살풀이의 원형인 것처럼 자리 잡았다.
조갑녀 명무는 그녀의 춤을 아끼던 주위의 권유와 춤을 공부하던 딸 정명희 교수(조갑녀전통춤보존회 대표)의 열정에 살풀이를 전수한다.
조갑녀의 남원살풀이에서 우리 춤의 특징인 무거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조갑녀의 남원살풀이춤은 국궁의 자제로 더 잘 알려진 비정비팔(非丁非八)의 안정적인 자세에서 정형화돼 있지 않은 자유로운 춤이다.
시나위 장단에 몸을 실어 우러나오는 대로 추는 것이다.
살풀이춤은 정해진 악보나 가락 없이 몇 사람들의 마음을 맞춰 연주하고 거기에는 즉흥적으로 추는 남원살풀이춤이 자연적으로 어울리는 것이다.
조갑녀의 남원살풀이춤은 그 어떤 춤보다 즉흥성이 높아 대중과 더 가깝게 소통하는 특징을 갖는 반면 춤꾼의 자기해석 능력에 따라 춤이 매번 다른 형태로 표현되기 때문에 춤을 배우는 후학들에게는 더 없이 어려운 춤이다.
온몸으로 관객과 호흡하면 춤판을 해석하고 손끝과 발끝에 무게를 실어 관객의 응어리를 풀어주었던 조갑녀의 춤에는 격변의 시대 흔적도 서양 춤의 흔적도 없다.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닌 새벽닭이 울 때 까지 좋은 것이 뭔지도 모르는 6살 여자아이가 망구십을 바라볼 때까지 춤이 좋아 추었던 한 명인의 몸짓이다.
일제의 문화통치 속에서도 남원의 향토성과 우리춤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명인의 열정 덕분이다.
남원시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 굴하지 않고 한평생 올곧은 우리 춤을 이어오기 위해 노력한 조갑녀 명무의 정신을 잇고 선생의 춤 저변확대와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지난해 3월 선생이 생전에 거주했던 터에‘조갑녀살풀이명무관’을 열었고 조갑녀전통춤보존회와 함께 조갑녀류 춤을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명희 조갑녀전통춤보존회 대표는 생전 조갑녀 명무가 봄을 맞는 설렘을 담아‘봄나들이’라는 주제로 20일 남원예촌마당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또 제89회 춘향제(5월 8~12일) 기간인 5월 10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후학들과 함께 어머니의 춤을 보여줄 계획이다./권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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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21 [20:24]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