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끝난 반민특위 활동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4/25 [17:08]

실패로 끝난 반민특위 활동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4/25 [17:08]



반민특위(反民特委)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줄인 말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1948년 9월 29일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이다.

반민특위는 그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별경찰대를 활용, 일제시대의 악질기업가였던 박흥식, 일제를 옹호하여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민족정기를 흐리게 했던 많은 친일매국분자들을 색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 유지의 핵심이었던 악질 친일파들의 청산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였다. 그들이 정부수립의 공로자이며 반공주의자라는 이유에서 석방을 종용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다. 결국 반민특위의 활동은 지지부진하다가 1949년 6월 6일 특별경찰대가 강제 해산하게 되어 사실상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중앙청의 사무실에서 중앙사무국의 조사관과 서기의 취임식을 마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친일파를 선정하기 위한 예비 조사에 들어가 7,000여 명의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하고, 친일파의 체포 준비에 들어갔다.

반민특위는 먼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친일파 가운데 도피를 꾀하는 자의 체포에 주력하였다. 1949년 1월 8일에 미국으로 도피를 시도하던 박흥식(朴興植)과 반민특위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던 이종형(李鍾滎)을 체포하였다.

이어 방의석(方義錫)·김태석(金泰錫)·이광수(李光洙)·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김연수(金秊洙) 등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친일파를 잇달아 체포하였다. 반민특위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자 자수하는 친일파가 속출하했다.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의 행적을 증언하거나 제보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은 높은 관심과 지지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한다.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시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했다.

대법원장 김병로는 반민특위의 활동은 불법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에 고무된 친일 세력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좌절시키기 위해 활동에 나섰다. 반민특위가 설치된 직후 친일 경찰과 친일파는 공모하여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은 다시 정부 고위 관리의 지원을 받으며 국회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는 한편 반민특위 사무실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활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서울시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내무부 차관 장경근(張璟根)의 주도 하에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특경대 대원을 체포하고 무장해제를 시켰다. 1948년 9월 22일〈반민족 행위 처벌법〉공포를 전후해 서울 시내와 국회에는‘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라는 내용의 삐라가 일제히 살포되기 시작했다.

다음날 내무부가 주관한 반공국민대회가 열렸다. 실상은 〈반민족 행위 처벌법〉반대 집회였다. 친일파 청산요구는 바로 공산주의라는 여론몰이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를 무력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법 개정을 시도했다.

특위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사업비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했다. 각 정부기관은 반민특위 자료 제출 요구에도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온갖 방해 책동으로 반민특위의 발목을 잡았다. 반민특위 요인 암살 기도 사건도 드러났다.

주모자들은 악질 친일파 노덕술과 일제 경찰 출신의 경찰 간부들이었다. 그리고 이문원 의원 등 소장파 국회의원 3명이 남로당 지시를 받았다는 혐의로 경찰에 끌려갔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김약수 국회부의장과 노일환 의원 등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기소된 친일파의 재판은 임시재판부가 담당하였으며, 이들의 재판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진행되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51년 2월에 폐지되어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행정부와 경찰간부, 그리고 친일세력의 방해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특경대의 해체와 함께 그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49년 8월 22일 폐지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해방 후 한국의 과제는 일차적으로 자주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친일파의 청산이 중요했다. 그러나 미국과 미군정의 친일파 보호정책으로 부활하여 사회 각 분야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민특위는 무너진 민족정기와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친일 세력과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와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친일 세력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히려 이들이 한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다. 사회정의가 무너져 가치관이 혼란에 빠졌으며, 이기주의와 부정부패 등이 횡행하는 토대를 제공한 셈이다. 친일파 숙청 문제는 단순히 반역자를 처단하는 차원을 넘어서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사회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이었다.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새로운 국가를 제대로 세우는 과업의 첫 단추가 바로 친일 청산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친일 세력과 이들은 배후에서 비호한 이승만 정부의 저항과 방해 공작이 전면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친일파 및 친일잔재 처리문제는 여전히 미제로 남게 되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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