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김성수일가의 비화(秘話)(10)

민족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5/24 [09:26]

인촌김성수일가의 비화(秘話)(10)

민족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5/24 [09:26]




동아일보 창간 시 초대회장에 박영효를 앞세워 민족 언론을 해보겠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출발을 했는데 경성방직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려놓고 보니 총독부의 눈치와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어 처음 출발과는 상당한 차질을 빚고 말았다. 총독부가 문화정치를 펴나가는데 있어 동아일보가 어떻게 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터득을 점진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인촌은 남은 재산까지 다 투자한 절박감에 어떤 방법을 취하던 간에 이문을 남겨 사업에 성공을 해보겠다는 마음이 절실하여 총독부가 원하는 대로 심경의 변화가 진행된 것이리라. 이 무렵에 또 하나의 민간신문 조선일보 창간은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가 발행주체가 된 까닭에 처음부터 민족지라고 자처 할 만 한 신문은 아니었으며 고작 신문명(新文明), 진보주의를 표방하며 출발한 것이다. 1920.8.27 조선일보는 미국상하양원 의원단의 서울방문을 기하여 자연화(自然化)라는 주제의 사설을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6일간의 정간처분을 받았는데, 정간이 풀린 지 3일 만에 9월5일자 신문에서 ‘우열(愚劣)한 조선총독부는 어찌하여 우리 조선일보에 정간을 명하였느뇨?’라는 문제의 사설을 쓰게 되어 또다시 무기정간처분을 받게 된다. 친일로 알려진 조선일보는 정간으로 인해 애국신문으로 둔갑되어 동아일보를 난처하게 만들고 만다. 동아일보는 극심한 재정난으로 직원들의 급료를 몇 개월씩 주지 못하는 어려운 상태였다. 그 해 9월25일자 동아일보는 장덕수(張德秀 1894~1947)가 쓴 기독교 관점에서 본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무기정간을 당하여 조선일보와 같은 민족지로 떠오른다. 설산 장덕수의 글 내용은 일본 황실의 상징인 3종의 신기(神器) 즉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칼(劒),거울(鏡),구슬(璽) 등 일본인의 신앙대상으로 형상을 만들어 놓고서 그곳에 숭배나 기도하는 행위는 우상숭배라는 직접적인 비판이 아닌 우리민족의 토속적인 우상을 지적한 것을 과장되게 비화한 것이다. 아무튼 그 때의 장덕수의 사설로 하여금 동아일보의 100년사에 항일민족지의 영예로운 기록으로 남아있는 제1차 정간 사건을 자부하고 있으나 일종의 서투른 곡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재정난으로 자진 휴간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으며, 1차 정간 문제와 관련된 모씨의 비밀보고서(齋藤實文書No.1007:일본국회도서관소장)는 항간의 여론 때문에 동아일보가 정간을 자초하지 않았나 하는 점과 문제를 일으킨 장덕수가 문책을 받지 않는 점을 볼 때 의구심이 든다. 장덕수의 본심이 사실이라면 일본황실에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사이또오 총독과 만나 의론할 여지가 없는 데도 일본 총독부와는 상당히 밀착된 상태였다. 일본 황실을 모독한 행위는 곧 죽음을 자초 한 것이다. 그 한 예로 일본황실의 상징인 국화문장(國花紋章)은 당시 일본인들의 존엄성은 대단한 것으로 백성들은 국화문장을 어떤 곳에도 사용 못하게 한 신성불가침의 상징이다. 동아일보정간은 40여 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총독부의 별다른 비위를 건드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후 속간을 하게 된다.

<오늘 발행된 동아일보는 판매보급을 중지당하고 이어서 무기발행의 정지의 명을 받았다. 동아일보 창립당시 박영효 후작(侯爵) 스스로 이를 통괄하고 온건한 주의주장에서 진실로 일선민족(日鮮民族)의 복리를 증진하고 문화의 발전에 공헌할 것이 기대되었으나,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격(矯激)의 언설을 실어 번번이 발매금지 처분을 받은바 있었다. 편집진용과 뜻이 맞지 않아 박영효 후작은 사장의 직위를 사퇴하였다.(중략) 그리하여 오늘의 신문에서 우상예배를 논하여 일부러 우리국민들(일본+조선)의 중추인 검(檢),경(鏡),새(璽)에 대하여 무이해한 망설을 듣고...(동아일보 社史)1권,p.152)

총독부가 신임하던 박영효사장은 물러났으나 이상협,장덕수,한기악 등 몇몇 친일적인 기자를 두고서 위의 글은 반어법을 구사한 것이었다. 그 후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와 김성수가 만나 일본황실의 상징인 3종의 신기를 모독한 것에 질책을 할 때, 인촌은 당당하게 맞서 폐간 할 테면 해보라는 뱃심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해 2월21일 3.1운동으로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송진우를 대동하고 재정이 어려운 동아일보 주식공모를 위하여 전국순회를 하게 된다. 한편 조선일보 정간은 3명의 배일기자를 축출하는 조건으로 2개월 만에 풀렸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문제의 사설을 쓴 장덕수는 주필 직에서 건재하다가 부사장직까지 승진함과 동시에 사이또오 총독과 밀회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호간에 상당한 음모가 숨겨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의‘우열한 조선총독부는 하고(何故)로 우리일보에 정간을 명하였느뇨?’라는 격렬한 논조로 조선총독부를 공격했는데도 2달 만에 복간되었다. 1924.1.2부터 1.6일까지 장문의 사설을 연제한 동아일보 촉탁기자 춘원 이광수를 인촌은 1923.10월에 북경으로 보내 도산 안창호의 자문을 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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