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악의 숙청 심화조 사건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6/20 [15:16]

북한 최악의 숙청 심화조 사건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6/20 [15:16]


 북한 심화조(深化組) 사건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숙청 사건이다. 1996년에서 1997년까지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대기근으로 인해 30만 명에 달하는 대량의 아사자가 속출했다.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시대에 활동한 고참 간부를 취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정일은 사회안전성(현재의 인민보안성) 내에 비밀경찰 조직인 "심화조(深化組)"를 설치했다.
 심화조는 주민의 경력, 사상 조사를 심화시킨다는 뜻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경제 위기와 대기근으로 인해 국민의 불만이 커진 점을 적극 이용했다. 김정일은 당시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있던 장성택(張成澤)을 심화조에 기용했다.
 그리고 단숨에 고참 간부들과 측근, 이들의 친척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대숙청을 감행하게 된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농업 담당 비서로 있던 서관희(徐寬熙)는 대기근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평양 시내에서 공개적으로 총살당했다.
 장성택의 정적인 문성술(文成述)도 숙청됐다. 심화조의 거점은 전국 수백 곳에 달했으며 수사 담당 직원은 약 8,000명에 달했다. 당시 숙청된 인원은 약 25,000명이었다. 이 가운데 10,000명은 피살당했고 15,000명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심화조의 역할은 중국의 문화 대혁명 당시에 활동한 홍위병과 비슷하다. 그래서 심화조 사건은 3대혁명 붉은 기 쟁취운동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판 문화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일성 밑에서 중책을 맡아온 사람들은 김정일이 다루기 까다로운 구신(舊臣)들이었다. 심화조는 이들을 남조선의 간첩으로 몰기 위해 극악무도한 고문을 자행했다. 남조선 간첩의 친척들이라 하여 숙청된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15호 정치범 수용소가 확장된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다. 심화조 사건에서 장성택이 자신의 오른팔로 발탁한 인물은 채문덕이었다. 채문덕은 사회안전부(경찰청)의 우두머리였다. 당시에는 사회안전부가 국가안전보위부(정보부)와 인민무력부(국방부)의 세력에 밀려나 있었다.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약 40%가 처형을 받기 전에 취조 중에 자살했다. 고문은 갈수록 심해졌고 사망자가 속출했다.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 최고 거물이었던 문성술은 고문 중에 사망했다. 심화조가 적발해낸 '간첩들'이 워낙 많아서 공개처형이 힘들어지자 심화조는 감옥에 총살대를 보내 감옥에서 곧장 사형을 집행했다.
 이 모든 악행을 총괄한 사람이 바로 장성택이다.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이 지나치게 커지자 적당한 시기에 이 사건을 마무리 지을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세력이 크게 위축된 인민무력부와 안전보위부에 비밀 지령을 내렸다.   
 무력부와 보위부는 김정일에게 사건을 제대로 보고하기 위해 내사를 하여 심화조의 수사에 위법성이 없는지 조사하라는 것이다. 김정일은 권력을 다지기 위해 벌인 일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고 있음을 깨닫고 직접 명령을 내려 심화조의 숙청을 지시했다. 1999년의 일이었다.
 보위부와 무력부가 합동으로 진행한 '역 숙청'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약 6천명의 심화조 수사관들 및 고문기술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총살 혹은 강제노동형 등의 중형을 선고받고 일제히 숙청되었다. 심화조 가담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김정일의 총애를 받은 장성택이었다. 채문덕은 장성택의 책임까지 떠넘겨 총살형을 받았다.
 김정일은 20세기 어느 독재자 못지않게 권력욕이 강했고 냉혹하며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 후계자였던 시절, 자신의 권력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자신의 작은아버지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및 김영주와 가까웠던 자신의 이복형제들을 숙청하며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1990년대 북한을 들이닥친 흉년과 경제난으로 김정일의 권력 기반은 크게 약했다. 김정일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마오쩌둥의 펑더화이 숙청, 그리고 김일성의 김창봉 숙청 등을 떠올렸다. 정책의 실패를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수법이었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공인된 이후에 계속 지도자 수업을 받아왔다. 그러나 19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획득하기까지 권력 세습이 순탄치 않았다. 김정일은 1960년대 말부터 '피바다', '꽃 파는 처녀'와 같은 김일성 세대의 항일유격투쟁 업적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영화로 제작하거나, 또는 연극 무대에 올리면서 김일성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것이 김영주와의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나 군부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이복형제 김평일의 행보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사건 직후 김평일은 북한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군 입대를 독촉하고, 여기에 자신 역시 직접 자원해 인민군에 입대함으로서 군의 신뢰를 높이 사는데 성공한다. 사실 김평일은 김정일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우선 김일성과 흡사한 외모를 지닌 김평일에 대한 지지도는 아주 컸다. 김일성은 김평일이 태어났을 때 "우리 집안에 장군감이 났다"면서 좋아했을 정도의 인물이다. 더구나 러시아 출생이었던 김정일과는 달리 국내 출신이었던 까닭에 소위 "백두혈통"에 대해 이의가 없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자신을 후계자로 발표하자마자 김일성의 측근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섭했다. 순식간에 김일성을 사실상 고립시키는 수완을 발휘한다. 마치 세자로 책봉되자마자 부왕의 측근들을 전부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꼴이었다. 김일성은 죽기 전에 김정일에게 너무 빨리 권력을 물려준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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