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성(城) 여인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8/30 [09:45]

수가성(城) 여인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8/30 [09:45]

 

 

열사의 중동지방은 돌밭 길과 사막이 많은 불모지 땅이 태반이다. 지금이야 사막에서 쓴물(석유)이 많이 나와 에너지원인 석유를 팔아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2천 년 전 그 당시만 해도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은 물이 없어 목말라 사람이나 짐승들이 갈증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우물은 큰 재산으로 자손 대대로 유산으로 남겨 재산목록 1호였다. 어느 날 예수가 이방인의 땅 사마리아의 먼 길을 여행 중에 갈증이 심하여 때마침 우물가에서 물 깃는 여인이 있어 물 한 그릇을 청했다. 그 여인은 유대인 예수를 보고서 ‘선생님이여! 저 같은 천한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물을 청하다니요?’ “아니다 어서 물을 다오.” 그 여인이 주는 물을 마시고 나서 너의 남편을 불러오라 하니 ‘저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래 네 말이 옳도다. 지금 있는 남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 네게는 또 다른 다섯 남자가  있으니 말이다.”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 여인에게 “네가 주는 물은  한없이 마셔도 갈증이 나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물동이를 내 팽개치고서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 예수라는 선생님이 주는 물은 영생수라며 더욱 신이 나서 큰 소리로 외쳐대며 여러 남정네의 품안을 훌훌 털고서 떠나 예수를 따라 새 생명의 길로 나선 것이다. 그 당시 여자는 조선조 때 남존여비사상과 같은 남자의 부속물쯤으로 여겨 한 남자가 첩을 대여섯씩 거느리고 살았다. 지금도 중동의 돈 많은 남자는 여럿의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 못 된 관습이 남아있다. 예수는 부모 없는 불쌍한 고아와 의지 할 곳 없는 과부와 친구가 되고 영육()간 병든 자를 고쳐주려고 이 세상에 왔다고 하였다. 바로 기독교의 진리와 사명이 여기에 있다. 탐관오리들의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조선조의 부패한 500년의 운이 다해 새 나라를 건설하려던 1894년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이 일어났는데, 조정에 보국안민(輔國安民) 등 주문한 여러 가지 중에 과부의 재혼을 허락하라는 조항이 있다. 그리고 하대 받는 백정이나 상놈들과 여성의 인권을 존중, 사람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인간평등사상과 어린이는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될 동량이니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지 말고 잘 양육하자는 소파 방정환의 말대로 훗날 어린이날을 제정하게 되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만 하여도 대지주와 권력자, 유산계급들은 손에 물 하나 안 묻히고 수많은 종과 첩을 거느리고 살았던 로마제국 등 동서고금을 통해 봐도 동일하다.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무적의 로마제국도 지배자의 횡포로 하대 받던 종들의 반란에 의해 망했다. 중원을 호령하던 명나라도 홍건적에 망했고, 백성의 소리를 무시한 무능한 조선왕조도 끝내는 망하여 일제 40년간 종노릇을 하게 된 처절한 뼈저린 아픔을 겪었다. 대동아전쟁에서 승승장구한 일제가 그렇게 쉽게 망하리라고는 몰랐다며 친일반성을 안한 서정주 시인이나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조선총독의 비호아래 만주진출을 하여 거부가 되어 적멸기(敵滅機)를 바친 인촌 김성수, 연수 형제 등 친일의 후예들이 금권을 휘두르며 지금도 정계, 재계를 주름잡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가 3만 불 시대를 열어 선진국대열에 진입했다며 자부심을 갖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이륙할 비행기를 회항하는 국제법을 어기며 부하직원과 가정부를 종처럼 부리며 인권을 무시한 3모녀의 갑질 사건은 조선조 말이나 별반 다름없다. 조부로부터 받은 돈이란 맘몬주의로 간 큰 여인들의 추태는 감히 생각 못할 여성의 엽기적인 반란이다. 세상은 너무나 많이도 변화되고 변질 된 것 같다. 2천 년 전 예수라는 성인이 나타나 개돼지 취급받던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물 깃는 여인에게 여섯의 남자로부터 성해방이 되어 헛된 세상 살지 말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네게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마시게 하겠다는 뜻은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으로 인권을 무시한 어지러운 세상을 새로운 정신문화혁명을 꾀하려는 큰 의미가 담겨진 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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