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호남정맥, 천황지맥의 남원 백공산百工山

큰 인물과 큰 부자의 출현을 염원했던 비보풍수의 남원 진산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9/05 [17:00]

금남호남정맥, 천황지맥의 남원 백공산百工山

큰 인물과 큰 부자의 출현을 염원했던 비보풍수의 남원 진산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9/05 [17:00]

 

▲ 백공산 정상서 필자와 답사단     © 새만금일보

 

<개요와 자연환경>

백공산은 남원부를 수호했던 진산(주산)이다. 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남원도호부의 진산교룡鎭山蛟龍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교룡산을 진산으로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필자는 이병채 전 남원문화원장과 남원시의회 양해석 부의장, 김석범 대장, 이영열 씨 비롯한 이용만 선생, 김현철 국장 등과 교룡산과 백공산을 답사하고 여러 문헌을 검토한 결과 백공산이 주산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백공산은 광주대구고속도로와 남원함양을 잇는 24호 국도 개설, 그리고 산 주변에 들어선 주택과 빌딩 등으로 혈맥이 끊겨서 외로운 섬처럼 변했다. 남원부의 비보사찰이었던 선원사도 도심에 위치해서 그 명성을 잃었다.

남원 옛 지도에는 남원성 동문에서 북쪽으로 백공산은 2km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 백공산 아래 남원의 비보裨補사찰인 선원사를 신라 헌강왕(875)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남원의 지세를 살펴보니 주인 된 산은 백공산이었다. 그런데 객산(손님 산)인 교룡산이 주인인 백공산보다 기가 강해 남원에 저해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 교룡산 군기고,유적발굴지     © 새만금일보

 

이에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북돋아 주기 위해 백공산에 선원사, 교룡산자락에 대복사와 만복사를 창건했다. 선원사는 백공산 끝자락인 지금의 위치에 비보사찰로 세워 백공산의 허약한 지세를 북돋우게 했다. 이처럼 선원사를 백공산 날줄기의 끝에 세운 뜻은 백공산의 약세를 보완했다. 약사여래불을 조성한 것도 불력으로 비보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객산인 교룡산을 진압하는 역할은 기린사와 대복사가 담당하였다. 교룡산(기린봉)에는 대복사를 세워 철불좌상으로 눌렀다. 대복사는 원래 도선이 교룡사라고 하였다. 만복사는 그 위치상으로 보아 교룡산 줄기의 마지막 봉우리로서 객산의 진압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교룡산서 본 치알봉(앞), 제월봉(뒤)     © 새만금일보

 

선원사 정문 현판에 만행산 선원사라고 쓴 이유는 금남호남정맥 팔공산에서 뻗어 나온 만행산 천황봉의 힘을 빌려 교룡산의 지나치게 강한 힘을 눌러 보자는 의도였다. 여기에 백공산의 힘이 축방향으로 들어 왔다가 미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축방향인 향교동 축천에 철로 만든 황소를 만들어 기를 눌렀다. 동시에 미방향인 선원사 부근에 선원사를 지어 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철로 지은 부처를 모셨다.

선원사 경내 약사전 앞에는 돌기둥 두개가 세워져 있다. 이는 남원의 형상이 배의 형국이라서 밧줄로 꽁꽁 묶어 두려했던 비보풍수의 유물이다. 지금의 동림교 주변의 요천 변에는 예전에 동림東林이라는 비보 숲이 있었다. 이는 남원의 주산인 백공산에서 흘러오는 남원의 정기가 요천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성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조산동에 토성을 쌓고, 인공으로 조산을 만들어 배를 묶어서 요천을 통해 빠져나가는 남원의 정기를 막았다. 또한 선원사에서 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려야 남원에 재앙이 사라지고 크게 번성한다고 믿었다. 이에 남원 백성들은 선원사 신도계를 만들어 절을 보호하고 후원해 왔으며, 역대 부사들도 각별히 선원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울려 퍼지는 선원사의 종소리를 선원모종이라 하여 옛 선인들은 남원 8경의 하나로 꼽았다.

▲ 백공산서 본 광암봉   © 새만금일보

 

남원의 진산을 백공산과 교룡산으로 주장하는 문헌과 의견들은 이렇다.남원지<향토설화, 선원사>에는 선원사는 비보사찰에 속하는데, 남원읍(현 남원시) 주산인 백공산이 약하므로 그 힘을 보충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백공산, 도통동과 월락동의 천사동, 미동에 걸쳐있는 산, 남원의 주맥이 됨이라고 나와 있다. 남원문화원의남원의 삶과 문화에서 <남원의 주산을 찾자>는 글에도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백공산을 남원의 주산이라고 주장했다.

용성지"백공산은 부(남원)의 동쪽 8리에 있으며 읍 터의 주산으로 삼고 있고 산의 형국은 지극히 작다"고 기록되었다. 소광섭 향토사학자도 "만행산의 끝자락의 조금은 작은 봉우리가 백공산이며, 남원의 주봉이다. 그 주봉의 세가 너무 약해서, 그 앞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만행산 선원사라 하였다"라고 주장했다.

최원석의우리 땅 풍수기행에도 남원의 지세는 백공산이 주산이고 교룡산이 객산인데, 주산은 약하고 객산인 교룡산은 산세가 더 커 주산이 객산에 압도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대해 삼한산림비기에서는 남원은 주산이 낮고 객산이 건장하여, 서자가 요망함을 부리고 관직에 있는 이에게 해독을 끼친다.’고 하였다.

 

▲ 백공산서 본 솟구리봉     © 새만금일보

 

반면 <<세종실록지리지>>처럼 교룡산을 남원의 진산(주산)이라고 밝힌 자료도 만만치 않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펴낸지리산 자락에는 "덕유산 자락에서 뻗어 내린 교룡산의 줄기인 기린봉 기슭으로 산자락이 절터(만복사지)를 나지막하게 감싸고 앞으로는 요천이 잔잔히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다. (중략)만복사 터는 현재 비록 폐사 터 이지만, 고려 초기에는 남원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거찰"이라고 했다.

물의 전설에서도 "남원의 옛날 마한의 땅으로 달궁이라 불렀으며 백제 때는 이를 고룡古龍 또는 용성龍城이라 적었다. 고룡은 '고미르' 즉 큰 용이란 뜻으로 지금도 남원의 진산을 교룡산蛟龍山이라 하고, 그 동쪽에 청룡산靑龍山이 버티고 있다고 밝혔다.

최재은도 <<남원의 풍수지리>>에서 "한우물 전설로 알려진 교룡승천지인 임금이 나올 군왕의 터전을 갖추고 있는 교룡산 이야말로 남원을 남원답게 하는 산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남원의 진산은 교룡산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상반된 자료들을 보면 남원의 진산이 현재 인식하고 있는 백공산이 아닌 교룡산도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백공산을 진산(주산)으로 봤을 때 교룡산은 객산(손님 산)이 된다. 그런데 객산이 더 웅장하다 보니 손님 산의 기운은 눌러야만 했을 것이니 당연히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북돋는 비보풍수를 적용시켰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백공산 옆 창주서원     © 새만금일보

 

만약 백공산이 아닌 교룡산을 남원의 진산(주산)이라고 가정해 봤을 때, 남원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가. 노상준 전 남원문화원장은 전라일보에 기고한 칼럼 <교룡산을 명산으로 가꾸자>에서 교룡산을 진산이라고 언급치는 않았지만, 교룡산이 남원의 중앙이며 국왕 탄생의 길지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룡산은 황룡산黃龍山이라하였다. 하지만 교룡산이 황룡산이라는 문헌이나 고증은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았기에 교룡산이 황룡산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날 백공산의 모습이 초라한 몰골로 변했지만 선조들이 예찬했던 남원의 주산은 백공산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선조들이 남원에 큰 인물과 큰 부자의 출현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비보풍수의 유물인 백공산과 요천, 조산, 동림 등을 잘 보전해야 할 일이다.

▲ 백공산서 남원의 산하 답사단     © 새만금일보

 

<산행안내>

o 1코스 : 천황지맥 갈치(721번 지방도로, 남쪽)-어끼재(견치)-고산봉-19번 국도-광주대구고속도로-24번 국도-백공산 북봉-백공산(6.0km, 3시간)

o 2코스 : 창주서원-남원기상대 뒤-백공산-창주서원(20)

<교통안내>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창주서원-남원기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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