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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가의 비화(秘話) (14)
*일장기 말소사건(1)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10/04 [07:41]

 

박춘금의 권총 협박사건은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동아일보를 타도하기위하여 꾸며낸 흉계인양 장황하게 기술하였으나 레닌 자금사건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한바가 없다. 인촌과 송진우와는 관포지교(管鮑之交)처럼 어쩌면 피를 나눈 형제 그 이상이었다. 7대 사장으로는 33개월 동안 재임한 근촌 백관수(白寬洙1889-1951)는 인촌과는 동문수학한 죽마고우로 인촌의 손발과 같이 움직인 인물로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 출신으로, 당시 명치대학 법학부 유학생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장으로 적국의 심장부인 동경 한복판에서 1919년 최팔용, 김도연 등 11인 학생대표와 2.8 독립선언을 한바 있다. 백관수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송진우의 후임으로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백관수는 조광조의 제자 휴암 백인걸(白仁傑1497-1579)10대 후손이며, 백인수는 그의 사촌형이었고, 독립운동가 부안출생 백정기(1896-1934)는 그의 일족으로 문중의 종손이었다. 의사 백정기는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 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구파(鷗波) 백정기 의사가 일본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운명하기 며칠 전 함께 육삼정 의거를 도모했던 이강훈, 원심창 의사에게 남긴 말이다. 아나키스트 백정기는 육삼정 의거 이듬해 일본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나이 39. 육삼정 의거가 상하이 3대 의거, 해외 3대 의거 중 하나인 큰 사건인 것처럼 이를 주도한 백정기는 윤봉길, 이봉창과 함께 ‘3의사’로 꼽힌다. 해방 후 19463의사의 유해는 김구, 안재홍, 조소앙, 정인보 선생 등의 노력으로 국내로 봉환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영화 ‘아나키스트’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몇 있을 뿐.  백관수는 여섯 살 때 간재 전우(田遇)를 스승으로 삼아 한학을 공부하였다. 사촌형인 갑운(甲蕓) 백인수(白麟洙)가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두 번이나 순국 자결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목격하면서 자랐다. 일본은 정한론을 자랑스럽게 역사왜곡을 하자 중국과 한국 등 일제에게 피해를 본 주변국들의 항의에 부딪치자 교과서 일부를 수정하는 척 하였으나 그 내면에는 언제든 조선을 침략하여 중국대륙을 지배하려는 야심이 전범자의 후손인 지금의 아베 정권에 까지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2차 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미국과 밀착하여 자기네 역사를 미국에게 넘겨주며 그것이 사실인양 미국은 일본의 역사자료를 이용하고 있으나 역사왜곡의 원흉은 일본이다. 100년 전 미국과 일본이 비밀협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자는 비밀협약의 흉계를 꾸몄던 1905년 을사늑약 시 일본의 가쓰라와 미국의 태프트 조약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45년 일제에서 해방을 맞아 죄 없는 한국을 두 동강이 낸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일본 일어난다. 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았다. 일본은 지금도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교과서에 실어 후대들에게 역사왜곡으로 땅뺏기 전쟁교육을 하고 있다. 동백림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 마라톤선수가 우승을 하였는데 일장기를 가려버린 사진을 동아일보에 실어 해방 후 일장기말소사건을 사회생활 교과서에 등재하였는데 언젠가 슬쩍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은 국내외 친일잔재세력의 옹호 속에서 언제나 민족주의라는 허울 좋은 가면으로 위장 미화되어왔고, 소수 항일기자들의 순교적인 업적을  터무니없이 과장한 일제통치자들에게 아부를 일삼아 온 것이다.  일본의 이름 있는 출판사 교세이출판사는 ‘현대에 살아있는 교육사상’이라는 전집 물을 출간한 일이 있었는데, 동아일보설립자 김성수와 4대 사장을 지낸 이승훈을 프랭클린, 제퍼슨, 존 두이 ,룻소, 니체,스펜서,버트란트 럿셀,인도의 간디,타골 등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만한 세계적인 위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미화시켜 김성수를 민족사학의 아버지라고 극찬 한바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도 동아일보 명예회장 김상만을 한국의 독제정권에 항거한 명예로운 언론인이라고 인터뷰한 사진을 크게 게재한바 있다.  이들 양대 언론사는 일제하에서 독점한 언론대표사로 해방 후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제도권 언론을 좌지우지한 언론의 모순구조와 연관성이 깊다고 보겠다.  광복군 복원선언에 의하면 구한말 군대 해산 이래로 의병봉기에서 비롯한 일제치하 전 기간을 통해서 의병,독립군,광복군이 벌인 무장투쟁은 640여회에 이르며 숱한 전투에서 희생된 의사, 열사는 10,000명이 넘었다. 국내외에서 옥고를 치룬 애국지사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는 중앙조선일보의 한 기자로부터 지워진 손기정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을 자기가 한양 과대 포장하였는데 수많은 독립운동의 의,열사들의 투쟁에 비하면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는 사건이라 보겠다. 일제 36년이란 쓰라린 식민통치에서 8.15를 맞은 우리민족의 가슴에는 친일파와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과의 깊은 골이 파여 해방된 지 74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민족정기를 바로잡지 못하고 친일잔재들이 날뛰고 있음을 볼 때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내선일체로 강제합방 된지 26년째인 동백림 올림픽 그 시절은  7대 미나미 지로오(南次郞) 총독이 부임하기 직전으로 미나미총독은 조선민족의 황민화(皇民化)에 박차를 가한 육군대장 출신 무단통치 자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경쟁적으로 친일선전의 지면을 채웠고, 김성수,김연수 형제는 미나미 총독의 총애 속에 만주진출의 나래를 펴기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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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4 [07:41]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