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과 전주의 역할”을 주제로 인문학특강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10/16 [09:45]

“동학농민혁명과 전주의 역할”을 주제로 인문학특강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10/16 [09:45]

 

 

 

 

전주문화원이 2019년 인문학강좌에 동학 전문가인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모셨다.

강의는 덕진동 호반촌에 있는 전북문학관에서 16일 오후 2시에서 열린다.

강사로 나선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이화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과 전주의 역할’에서 촛불혁명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과정을 강연한다.

강의내용은 우리 선열들은 1894년 애족애국의 투철한 정신으로 부정부패 세력과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려 분연히 일어나 공주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저지에 뜻을 접고 말았다.

이 동학농민혁명에는 100만명이 참여했고 10만여 명이 회생됐다.

그들은 무슨 이유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죽었는지 한번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또 우리 민족사에 어떤 의미를 던지고 있는지도 돌아보고자 한다.

1894년 3월 20일에 전봉준 등 지도부는 고부봉기에 이어 무장에서 농민군을 모으고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부정한 세력을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담은 포고문은 전국으로 배포됐다.

먼저 전라도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군들은 백산에서 총집결해 부서를 결정하고 항전을 다짐했다.

그리고 감영이 있는 전주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전라감영에서는 감영군 700명과 향군 600명을 동원해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농민군은 당시 관군에 맞서 황토현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전주에 입성해 전주 삼천에서 하룻밤을 자고 전주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이때 동학군을 평정하는 임무를 띤 양호초토사인 홍계훈은 전주에 도착해서 조정에 청군이나 요청하고 엉뚱한 전라감영 영장인 김시풍을 잡아들어 쳐 죽이고 또 군교인 정석희를 잡아 심문한 후 죽이는 사건 등이 벌어졌다.

정부의 청군 요청으로 일본군도 빌미를 잡아 조선으로 들어오니 전봉준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2차 봉기를 한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서 전주는 동학혁명의 가장 중심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일깨우며 전주 정체성의 한 단면을 찾아보려 한다. 

또한 전봉준의 발자취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계기를 삼고자 한다. /이인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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