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충무공을 기리다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1/04/30 [10:19]

이 충무공을 기리다

새만금일보 | 입력 : 2021/04/30 [10:19]

 

 

1545428일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여 하였다. 조선 정조 때부터 추모행사로 기려왔는데, 일제 강점기에 묻혔다가 광복 후 다시 부활, 1998년 충무공 순국 400돌을 맞으면서 기념사업이 활성화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늦은 나이인 1572(선조5)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부상으로 낙방하였는데, 그 후 30세가 넘은 1576(선조9)에 식년시 무과 병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이순신 장군은 1583(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부친상을 마치고 1586(선조 19)에 다시 관직에 복귀,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어 이듬해 여진족의 급습을 막아내지 못한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정읍현감과 1591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훈련과 함께 왜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드디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경상도 옥포해전, 당포, 사천 등에서 왜선을 크게 격파했다. 특히 사천해전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는데, 이때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어 큰 활약을 했다. 이순신 장군에게 패배한 왜군은 전라도로 가기 위한 한산도 해전에서 왜선 73척과 싸워 59척을 물리친 한산도대첩을 이뤄냈다.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잡아, 왜군은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이순신의 판옥선을 만나면 도망을 하라는 풍신수길의 명령까지 떨어졌다. 연전연승한 이순신은 벼슬이 3도 수군통제사로 정2품 정헌대부까지 오른다. 그러나 충무공은 원균을 도와 칠천량 해전참전에 불응, 적과 내통했다며 선조왕은 사형을 내려 그 때 하마 죽을 뻔 했는데 유성룡의 진언으로 생명은 부지되었으나 삭탈관직 되어 백의종군(白衣從軍)이란 치욕을 감내하며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출전을 했는데, 요즘의 해군 중장에서 무등병, 졸병으로 나가 싸운 것이다. 1598년 정유재란 시 ‘명량해전’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우는 최후의 결전장에서 ‘상유12 순신불사’ 아직 배가12척이요 순신은 죽지 않았다며 ‘사즉생(死卽生) 생즉사(生卽死)’를 외치며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과 맞서 적장 구루지마의 목을 베는 등 대승을 거두는 기적을 낳게 된다. 이 명량대첩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하여,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었다. 풍전등화격인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장군은 1598년 관음포 노량해전에서 도주하던 적선을 섬멸하던 중 적탄에 맞아 전사 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적을 물리쳐 승리를 하였으나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에 갑옷과 투구를 벗고 뱃전에 나와 적탄을 맞아 자결한 것이라고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와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적탄을 맞은 이순신은“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명나라 해군제독 진린(陳璘)은 명황제에게 ‘이순신은 문무를 갖춘 장수로써 왜군을 물리쳐 조선을 구한 출중한 명장으로 전쟁이 끝나면 조선조정은 모함으로 이순신을 반드시 죽이려 드니 황제께서는 이순신을 명나라 장수로 삼아 생명을 구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장계를 올렸다한다. 1643(인조21)에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659(효종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그리고 1707(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牙山)에 그의 사당 현충사(顯忠祠) 사액 현판이 내려졌으며, 1793(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충무공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통영 충렬사, 여수 충민사, 아산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세계역사상 이름난 3대 해군제독으로 이순신장군과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함대를 물리친 영국의 넬슨(1758-1805) 제독과 청일전쟁과 러시아의 최강 발트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도고헤이하치로(1848-1934)’ 제독은 이순신의 학익진법을 응용하여 승리로 이끌었다며, 조선의 이순신제독을 가장 존경한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절반의 백성을 잃었으며 삼천리반도의 문화제가 거의 불탔다. 임진란이 끝난 후 국왕과 사대부들의 당파싸움으로 1636년 병자호란을 또 겪게 되어 인조왕은 청의 왕에게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조아린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한 굴욕을 당하고 죄 없는 부녀자와 장정들 수 십 만 명이 종으로 끌려가게 된다. 드디어는 조선조말 무능한 왕과 탐관오리들 때문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36년간 종살이를 하였다. 해방된 이 땅에 지금도 일본의 극우들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전쟁을 해서라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400 여 년 전 임진왜란 시 바다의 왕 성웅 이순신장군과 수많은 의병들이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그 날을 기리며 든든한 국방력과 힘을 기르고 남북이 하나 되는 날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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