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역사박물관(상)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3/06/05 [08:57]

강화도는 역사박물관(상)

새만금일보 | 입력 : 2023/06/05 [08:57]

강화도는 역사박물관(상)

 

바다를 통해 한강을 거슬러 서울에 곧바로 입성하려면 좁은 강화도(江華島305km2)해협을 통과해야한다. 강화도는 선사시대의 지석묘군과 넓은 갯벌과 들과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문화의 발상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격전지였으며, 또한 강화도는 한반도의 중심부로 예성강, 임진강, 한강 하구에 위치한 해상교통의 요충지다. 1231년 몽골군의 공격을 받은 고려궁을 강화도로 옮겨 40여 년 간 임시 수도로 삼았다. 강화도의 좁은 해협은 고려에게는 최고의 요새지인 방어벽이요, 몽골군에게는 건널 수 없는 해자(垓字)가 되었다. 고려는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마니산(472m) 정상에 참성단을 쌓아 천신과 단군께 제사를 지내며 국난을 극복할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했다. 전등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들은 막강했던 고구려시대로 되돌아가, 강화도는 고조선과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통의 고을로 긍지심을 갖게 했다. 궁성과 강화산성을 쌓아 해안마다 제방을 겸한 외성의 진지를 쌓았다. 그리고 고려시대 최대의 문화적 업적인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으며, 1270년 환도 이후 강화도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조선시대 때 피난처로 강화유수부가 설치되었다.  1627년 후금(청)이 조선을 침공한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여 100일 동안 머물기도 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미처 강화도로 피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47일 만에 항복을 했다. 이런 병화를 겪으면서 강화도는 조선 최후의 방어지로 주목받아 효종, 숙종 때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섬 전체가 요새지가 되었다. 한강하구에서 배로 30분이면 당도 할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서 조선과 프랑스, 미국과의 전쟁,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등 외적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낸 고려와 조선의 마지막 보루(堡壘)였다.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약 6,000책이 소장돼 있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 건물과 함께 대부분 불태워졌으며, 의궤를 포함한 중요도서 300여권을 프랑스군이 약탈해갔다. 2002년 외규장각 건물 복원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2011년 5월 27일, 297책(의궤 294책)이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이다. 선명하고 정교한 반차도(班次圖)와 도설(圖說)을 담고 있는 진본 의궤는 강화군민들은 물론 온 국민이 자긍심을 갖게 하는 문화유산으로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해군 장교 쥐베르(M. H. Zuber)가 남긴 기록이 있다.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는 대원군이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 9명을 극형에 처한 것에 대한 보복성 군사작전이다. 중국 지푸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 제독은 10월 11일 군함 7척을 이끌고 원정을 나서 14일에 강화도 갑곶진(甲串鎭)에 상륙하고 16일 강화부를 점령한다. 조선은 순무사 이경하(李景夏, 1811~1891), 천총 양헌수(梁憲洙, 1816~1888) 등 무장들에게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을 지키게 한다.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 중인 양헌수가 이끈 500명의 사수들의 공격을 받고 갑곶으로 패주한 프랑스군은 한 달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수하면서 관아에 불을 지르고 보물급을 약탈하여 중국으로 떠났다.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이조판서를 지낸 이시원(李是遠, 1790~1866)과 이지원(李止遠, ?~1866)형제가 자결했다. 강화도에는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판당의 위치, 고려의 무단정치의 마지막 집정자 최이(崔怡, ?~1249)와 최항(崔沆, ?~1257)의 무덤 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80t급)가 1866년 12파운드의 대포 2문과 총 24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셔먼호는 8월 9일 중국 지푸항을 출항하여 평양 대동강 만경대(萬景臺)까지 올라와 병인사옥(丙寅邪獄)의 보복으로 프랑스함대가 내침할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교역을 강요하였다.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군인이 죽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몰살시켰다. 미국은 그 후 보복으로 조선원정을 단행하여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게 되었다. 병인양요 때 대원군(大院君)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하였는데,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천 명을 학살을 하는 큰 우를 범하게 된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 한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은 살았는데 그 중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P.G. 로즈에게 박해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원정을 촉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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